Tuesday, November 7

네팔교회의 역사

 
네팔교회의 역사
네팔교회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독특하며 그 역사 또한 매우 짧다. 네팔은 1950-51
사이에 있었던 혁명 이후에야 외국인과 기독교에 대하여 그 문호를 열었기 때문이다.
리고 한때 박해를 피하여 다즐링(네팔 국경에 접한 인도 동북부 지역)에 이주해 갔던 네
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네팔교회가 세워지고 발전하여 왔다. 따라서 오늘날 네팔교회들
은 강한 힌두교 사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하여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가 네팔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17, 18세기에 인도로부터 티벳에 들어가
려는 제수잇파(Jesuits)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당시 네팔 기독교인은 티벳에 살고 있는 상
인들 몇몇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네팔선교는 1715년에 들어왔던 두 명의 수도사
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당시 네팔은 아직도 여러 왕국으로 분열된 상태였는데 이 수도사
들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카투만두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료시술을
베풀었다. 하지만 이들은 외국인 첩보원으로 의심을 받아 1722년 카투만두로부터 추방을
당하였으며 1731년까지 박타풀에 머물러 있다가 결국 1734, 선교를 포기하고 네팔을
떠났다. 그후 1737년 카트만두왕국과 박타풀왕국의 두 왕은 그들을 다시 불러들여 -'양심
의 자유 헌장'(Decree of liberty of conscience)이라는 명분으로- 선교의 기회를 허락하였
. 그러나 1769년 고르카왕(Prithvi Narayan Shah)은 카트만두왕국, 박타풀왕국 그리고
파탄왕국을 통일하고 '고르카왕국'을 세웠으며 왕은 기독교인들을 가두며 죽이는 등 심한
박해를 하였다. 그리고 1950년까지 약 200년 동안 네팔은 철저하게 외국인과 기독교인들
에 대하여 문호를 닫게 되었다.
한편 1800년 초에 인도에 사는 영국인들이 인도 북동부 다즐링 지역으로 차() 생산
을 위하여 이주하여 갈 때, 그들은 기독교 선교사들과 목사들을 앞세웠다. 또한 많은 네
팔인들도 일거리를 찾아 다즐링으로 이주하여 왔다. 그래서 이곳의 네팔인들은 자연스럽
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성경이 최초로 번역된 것도 1850년과
1852년 사이 이들 영국인 목사와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처음은 누가복음과 사도
행전) 이 책들은 10년후 다시 수정되어 재출판되었고 성경번역작업은 계속되어 1915년에
비로소 전() 성경이 네팔어로 출간되었다.
이와같이 네팔은 오랫동안 외국인과 기독교에 대하여 문호를 열지 않았지만, 선교사들
은 네팔과 인접한 인도 북구 국경지역에서 일하며 복음과 함께 네팔에 들어오기를 오랫
동안 기다렸다. '국경선교회(Nepal Border Fellowship)'도 이 때(1935) 만들어졌으며 그
들은 네팔을 향해 기도로 복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러한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 가
운데 네팔이 외국인에 대하여 그 문호를 열게 되었다. 특히 100여년 동안 강권통치를 해
왔던 '라나'왕족이 드디어 무너지게 된 것이다. 쇄국정책으로 인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과
경제적인 피폐로 말미암아 국민들은 왕가에 불만을 갖게 되었고 일부 지도자(네팔 의회
주의파: Nepal Congress)들은 혁명세력을 키우며 네팔과 인도지역에서부터 반정부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이들은 인도에 망명중인 트리브반 왕족의 지지를 받아 국경선으로부터 관
공서를 습격하는 등 대대적인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면서, 결국 19512월 트리부반 왕이
인도로부터 돌아와 새 정부를 세움으로 인하여 '라나'왕가(王家)는 종식되었다.
이러한 혁명 이후 새 정부는 문호를 개방하였다. 인도에 피신한 네팔 기독교인들은 본
국으로 돌아왔고 외국인들과 선교사들의 입국이 허락되
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타인에게 전파할 수 없었다. 정부는 이 들 선교사들에게 국가 발전에 도움을 주는
각종 개발사업만을 요구할 뿐 일체의 정치활동이나 기독교로의 개종을 위한 선교활동등
은 법으로 규제하였다. 힌두교를 국가종교로 보호하는데는 결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일부 카톨릭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웠고 (1951년에 '고다와리' 고등
학교가, 1954년에는 '성 사비에르' 학교가 제수잇파에 의하여 , 그리고 1955년에 '성 마리
' 학교가 로마카톨릭에 의해), 개신교 선교사들은 병원건립과 함께 의료활동 등을 추진
하면서 선교단체들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NEB'(Nepal Evangelistic Band 나중에 'INF':
International Nepal Fellowship으로 개명)'는 포카라에 'Shining Hospital'을 세웠고(1953
), 'UMN'(United Mission to Nepal)1954년에 조직되어 카트만두와 탄센에 의료활동
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네팔의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복
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워나가기 시작하였다. 네팔의 최초의 교회는 인도에서 예수를 믿
고 들어 온 '부디 사가'에 의하여 포카라에 세워졌으며 카트만두에는 1962년에 비로소 최
초의 교회가 생겼다. 전도와 개종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졌
. 강한 힌두교 사회는 이 들을 때리고 추방하며 갖은 핍박을 가했고 정부는 또한 이들
을 온갖 위협을 주며 감옥에 가두었다. 특히 트리브반 왕위를 이어받은 마헨드라 왕은 네
팔을 '한 정당, 한 종교'의 국가개념으로 다스리기 위해 신헌법을 만들어 기독교의 전파를
강력하게 막았다. 이러한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교회와 교인의 수는 꾸준히 늘었다. 1960
년대에 이미 여러 개의 선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곳곳에서 생겨났으며 활동을 전개하였
. '성경번역선교회'(WBT), 'YFC'(Youth for Christ), 'OM' 등이 이 때부터 이미 사역을
시작하였다. 1959년에 탄생한 '네팔기독교협의회'(NCF: Nepal Christian Fellowship)는 차
츰 교회의 수를 늘리며 현지인 기독교 조직체로서 계속 성장하였다.
네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또 한번의 분수령이 된 것은 1990년에 있었던 '네팔사태'
이다. 1972년에 뒤를 이은 비렌드라 왕정은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지식인들의 반정부 민
주화운동으로 어려운 국면을 맞다가 19904월에 유혈사태를 끝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새 헌법에 의하여 국왕은 정치권 밖으로 물러나고 다수정당에 의한 '의헌 민주주의'를 채
택하였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있던 수많은 기독교인을 풀어주며 정부는 '종교의 자유'
보장하였다. 히말라야 골짜기에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문을 활짝 여신 것이다. 이제 기
독교인은 1.0%에 이르게 되었고 교회도 크게 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인들의 공공집회가
열리기도 하고 기독교 단체들이 활발하게 사역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네팔을 위하여 더욱 끊임없는 기도가 요청된다. 그것은 네팔의 선교적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첫째로 강한 힌두교 사회는 여전히 기독교의 선교를 대
항하고 있다. 지금도 네팔 이곳 저곳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몰매와 돌던짐'을 당하며 전도
와 집회를 방해받고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개인은 온갖 불이익을 당하여 가족과 친척들
로부터 추방을 당한다. 둘째로 '개종을 금지'하는 헌법의 조항은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위정자(爲政者)들은 집권세력의 성격에 따라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 또다
시 기독교인들을 가두며 박해할지 알 수 없다. 사탄은 '권세잡은 자'들을 다스리며 권세잡
은 자들은 힌두교를 통한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유지하려고 한다. 셋째로 선교사들의 입국
과 활동을 제한하는 것도 결코 변하지 않았다. 정부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활동을 배
제한 사회개발사업만을 요구하며 선교사들을 감시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든지 선교사를
추방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다. 결국 선교는 끊임없는 '영적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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