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24

christian history


19세기 말 한국에 서구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시작 된 이후 한국에 기독교가 놀랍게 성장해 왔습니다. 요즘은 한국에 4명 중 1명은 기독교 신자인 정도로 한국 개신교는 발전 되었습니다. 선교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손을 잡고 해야 되는 하나님의 일이 입니다, 그래서 서구 선교사들은 조선을 생각하면서 조선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를 했고, 한국을 선교하기 위해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에서 언더우드, 감리교에서 아펜젤러가 함께 왔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인천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부산에 1885년 4월2일 아펜젤러가 도착 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비록 교파는 달랐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언더우드는 본래 인도에 선교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 지를 결정하는 마지막 순간에,  “No one for Korea! How about Korea. ” 하늘의 음성을 들은 후 생각 바꾸어 조선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아펜젤러도 처음 계획은 일본 선교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무사 계층에서 집단적인 개종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조상이 스위스 용병 출신이던 그에게 일본은 매력 있는 선교 지였습니다. 기숙사의 같은 방 동료 워주워드가 그런 조선을 자신의 선교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1 년 앞두고 개인 사정으로 선교를 나갈 수 없게 된 워즈워드가 아펜젤러 “나 대신 조선에 갈 수 없겠는가? 부탁하자, 고민 끝에 친구 대신 조선으로 나오게 된 것이 입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모두 처음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끌려 조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조선에 들어 올 때 가지고 온 성경을 대부분 한굴로 번역하는 착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2 년 만인 1887년 여름 (마가의 진한복음언해)라는 제목으로 쪽 복음을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하였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성경번역과 출판사업이 한국교회 전체의 사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두 선교사는 비록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교파교회 형태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선교 지에서만큼은 서로 협력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87년2월7일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의 집에서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감리교에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W. B. Scranton)장로교에서 언더우드와 혜론 (J. W. Herron) 등이 참여 하였습니다.이것이 오늘의 대한성서의 출발이 입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사람은 복음 전도와 목회 분야에서도 협력하였습니다. 조선인 교회는 1887년9월과 10월, 열흘 간격으로 설립 되었는데 장로교회는 언더우드의 정동 사택 사랑방에서 감리교회는 아펜젤러가 조선인 전도자들 위해 구입한 남대문안의 “베델 예배당” 에서 각각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의 출발 입니다. 10년 세월이 흐른 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 선교 증청관 불필한 경장을 피한다” 는 명분으로 선교 지역 협정을 맺어 한반도를 교파별, 선교부별로 분할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 교회의 교파의식에 지방 생이 겹쳐져 훗날 교회갈등의 한 원인으로 작용 하였지만 적어도 한국설교를 개석 했던 아펜젤러, 언더우드 두 선교사의 오기 전, 그리고 오고 날 이후 보여 준 삶의 모습을 보아도 둘은 선교와 교육, 전도와 목회 틍 모든 분야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한 줄 아는 동역자였습니다. 둘은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독립이 아닌 나눔으로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한국 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출처] 한국 기독교 역사 |작성자 san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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